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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흑백사진 10. 아주 오래된 식영정 풍경

글쓴이 baezzang   2009/11/02 08:12 GJ Library/추억 상자    

아주 오래된 식영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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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식영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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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식영정


많이 다르다. 식영정(息影亭)이 거기 서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데, 주변 풍광은 다르다. 물론 도로도 그 자리에 그대로이고, 그 앞을 흐르는 자미탄 강 길도 비슷하지만 뒷 배경은 너무 달라 색다른 느낌이다.

하기야 반 세기의 세월이다. 60년대라니 초근목피, 산 자락에 소나무 껍질 하나까지 다 벗겨다 먹던 시절의 사진이다. 지금이야 산림녹화를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큼 이뤘으니 뒷산 별뫼(星山:성산별곡의 성산은 여기에서 따왔다)가 민둥산인건 색다르게 보일만도 하다. 식영정이 있는 언덕배기만 소나무가 보존돼 있고 성산은 아예 반들거릴 정도다. 산 꼭대기 부근에 소나무 한 그루가 이채롭다.

그래도 역사적인 유물 주변은 보호할 줄 알았던 어른들의 지혜는 본받을 만하다. 아마도 땔감으로 주변 산 모든 나무를 베었을 법 한데, 식영정 주위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건재하지 않는가. 지혜롭다.
또 멀리 보이는 식영정의 자태도 그대로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식영정 오른쪽으로 숲이 우거져 있다는 것. 이곳에 지금은 <송강집>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1973년), 부용당(1972년) 등의 부속건물들이 들어섰다.

식영정은 원래 1560년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임억령이 지었고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얼핏 그늘지는 아름다운 정자 정도로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은 굉장히 도교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이전투구, 이합집산의 난장판같은 정치에 휩쓸리기 싫어했던 임억령이 말년 담양부사시절 이곳에서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에게 도학을 강론하며 지냈다는 사실을 덧붙여 보면 자신을 항상 뒤따라 다니는 그림자마져 내려놓고(쉬게하고) 조물주처럼 자유롭고 호방무애한 삶을 살고싶다는 바람을 표현한 이름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임억령이 쓴 ‘식영정기’에는 그런 도교적 색채가 짙은 설명이 나온다. 그만큼 빼어난 풍광을 자랑했던 곳이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식영정은 1972년 전라남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제 헐벗고 굶주리던 6~70년대를 넘어 별뫼는 물론 정자주변에도 푸른 숲이 우거져 정자가 보이지도 않고, 앞은 잔잔한 호수로 변했다. 가히 임억령이 다시 찾아오고 정철이 노닐며 시 한 수읊을만한 곳이 되었다 하겠다. 그래서 이젠 더 이상 요란스러운 개발만 없길 바랄뿐이다.

- 글 : 김옥렬 (전대신문 편집위원)

ps. 계간으로 발행되는 광주지하철의 사보 메트로에 추억의 흑백사진을 연재하고 있는 김옥렬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오랫만이라서 더욱 반갑게 받았다. 간만에 새 글을 올렸다는 소식에 선배의 글을 받아보았다. 이번 연재기사는 광주사람들이 자주찾는 명소이지만 소재지는 담양군 남면에 있는 식영정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결혼전 남편과 데이트 장소로 많은 추억을 물들였던 곳이라 추억을 떠올리게 되었답니다. 이웃님들께서도 식영정에서 그런 추억 하나 만들어 보시길..강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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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흑백사진 9. 사라져간 경양방죽

글쓴이 baezzang   2009/09/22 08:30 GJ Library/추억 상자    
소멸은 늘 아쉬움을 남기기 마련이다.

농자천하지대본이였던 시대 치수 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물을 잘 관리하는 것이 곧 제일의 정치였던 시대,

1440년 세종 22년 세종의 중농정책을 받들어 김제부사에서 광주 목사로 부임한
김방이 3년여에 걸쳐 호남 최대의 인공호수를 만들었으니, 그 이름은 경양방죽 !

광주고등학교~계림초등학교~광주상업고등학교의 정문앞에서 부터 부채꼴 모양으로 남서쪽 일대에 펼쳐진 면적 4만6천여평, 수심 10m 의 경양방죽은 이후  5백여년 동안 광주사람과 함께해왔다.

2-3백년된 거목들이 큰 숲을 이루어 여름이면 그 그늘에서 땀을 식히곤 하였고,
팽나무, 귀목나무, 왕버들나무, 수양버들이 즐비해 광주사람들에게 낭만의 공간이었다.
호수에는 두개의 섬이 있었으며 맑은 물에는 잉어, 붕어, 가물치가 많아 물위로 튀어 올랐다.
봄이면 북, 장구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울려 퍼졌던 풍류의 한 장소. 겨울이면 얼음을 제치면서 스케이트를 타던 곳. 뱃노리를 즐기는 유람객들에겐 낭만과 추억을 선물했던 데이트의 장소였으리라.
 
광주시민들의 젖줄이자, 쉼터 그리고 낭만의 대명사로 자리해왔던 경양방죽은
1940년 일제의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조성한다는 명분으로 2/3가 매립되었고,
1966년 광주시의 수원 기능의 약화와 수질 오염 그리고 도시 확장등을 이유로 매립되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만수위때의 경양방죽의 모습이다. (1946년)
한껏 멋을 부리고 양산을 바쳐든 아낙네와 힘차게 노를 젓는 남정네...이들은 아마도 데이트를 즐겼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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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3가 매립된 뒤의 만수위때 모습


한 동네의 무리인가. 아님 한 일가인가. 아이들과 아낙네들에게 뱃놀이라는 특별한 추억을 선물하고자 했을 저 어르신네는 지금쯤 어찌 되었을까. (1940년. 광주1백년사진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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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뱃노리를 즐기던 유람객들 (자료: 광주1백년사 기념사진전)


두 개의 섬이 있다는 기록을 입증이라도 하듯 경양방죽이 품고 있는 섬이 하나 보인다. 축축 늘어진 수양버들에 풀을 뜯는 소가 한가로움을 더한 목가적 풍경이다.  1961년 광주여고 졸업앨범 중에 이런 사진이 있었을 만큼 경양호는 광주의 상징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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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광여고 졸업앨범 중


아니...이건 웬 이색적인 풍경인가. 얼음을 재치는 얼음 썰매도 아니고...
꽉 낀 상하의에 날선 스케이트라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모습들이 프로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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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미상 (자료: 빛고을 1백년사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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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흑백사진 8. 58년 충효동 왕버들나무 위의 추억

글쓴이 baezzang   2009/08/28 08:30 GJ Library/추억 상자    

왕버들나무 위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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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뜨거운 여름 날, 아이들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맑은 개천에서 멱을 감았으리라. 물놀이에 지친 아이들은 들판을 가로질러 오며 소꼴을 뜯겼을 것이며, 더러 개구리며 뱀을 잡아 구워먹기도 했을 것이다. 때론 뒷산에 올라 떫은 ‘맹감’을 따먹으며 허기를 달랬을 것이며, 그러고도 긴 여름의 땡볕이 지겨울 무렵이면 마을로 돌아와 그늘 넉넉한 왕버들 밑에서 낮잠 한 숨 자지 않았을까? 더욱이 얼마나 놀기에 좋은 왕버들인가?  마치 아이들 놀이터 전용으로 만든 것인 양, 큰 줄기는 옆으로 누워 개구쟁이들을 유혹하지 않는가?

1958년에 찍었다는 충효동 왕버들 나무아래 풍경은 꼭 그렇다. 꼴 뜯기고 들어오다 매어놓은 소의 모습까지도.

이곳 광주시 북구 충효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그 개구쟁이들뿐 아니라, 1970년대 이전 우리네 어린 시절의 시골은 다 그랬다. 여름이면, ‘아이스께끼’ 장사라도 오지 않는 이상은 무료하고 힘들었다. 놀다 놀다 할 일없으면 저렇게 나무 위에 올라가서까지 놀았으니까. 그냥 올라가서 놀기만 했으면 그나마 얌전한 편. 어떤 녀석은 그 곳에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임시 아지트까지 마련해놓고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하기도 했다. 사진 속의 충효동 왕버들 나무를 타고 노는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그래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놀 시간이 없어서 놀지 못한다. 컴퓨터며 TV에 무한한 종류의 장난감까지 놀거리는 널려있지만 학원 다니느라 시간이 없다. 어디 저렇게 나무 위까지 올라가서 놀 생각을 하겠는가. 떨어져 다칠까봐 말리는 어른들도 훨씬 많을 테고. 그나마 시골에는 인구감소로 놀 아이들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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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의 왕버들은 지금도 건재하다. 요즘 광주 시민들의 휴식처로 꽤 유명해진 충효동 광주호 생태공원 일대의 이정표 역할을 하며 위용을 뽐내고 있다. 400년 수령을 자랑하는 세 그루의 왕버들은 풍성한 그늘 뿐만 아니라 위안과 추억까지 주며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이 왕버들은 충장공 김덕령의 후손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가 16세기 중반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정조가 김덕령 일가의  충·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비각 앞에 심어진 것으로 보아 모두 충장공과 관련되는 나무로 보인다. 이 왕버들 주변엔 당초 소나무 한 그루와 매화나무, 왕버들 다섯 그루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버들 세 그루만 남았다.

이제 왕버들나무는 보호를 위해 아이들이 무시로 올라가 놀 수 없게 됐다(광주시 기념물 제6호). 하지만 왕버들나무를 타고 노는 사진이 어른들에겐 어린 시절의 진한 추억을 느낄 수 있게 한다.


- 글. 김옥렬 (전대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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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8 08:30 2009/08/2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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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흑백사진 7. 추억의 골목길

글쓴이 baezzang   2009/07/29 08:00 GJ Library/추억 상자    

추억의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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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어느날 광주여고 주변

어느 무르익은 봄 날이거나 초여름 오후. 골목은 평화롭고 조용하다. 사진을 찍은 이가 누구인지, 왜 그곳에 주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골목길의 풍경은 여유롭다.

 돈이 없는 아이들은 만화방을 기웃거리고, 무엇인지 모를 물건 파는 아저씨 좌판은 한가할 뿐이고, 양장점 앞 여인네들이나 그 앞을 지나는 멋쟁이 중절모 아저씨도 급할 게 하나도 없는 폼새들이다.
 여유가 있다. 거리도 여유가 있고, 그곳을 무대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도 넉넉하다. 차림은 비록 화려하지 못하고, 분명 가진 것 없어 궁핍했을 60년대지만, 거리 표정에선 궁핍과 분주함, 삭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연출된 영화세트처럼.

 아이들에 주목했다. 동무와 어깨 걸고 어딘가를 가는 녀석들, 만화방 앞에 제법 진지한 폼으로 전시된 만화를 들여다보는 아이들, 그리고 골목을 가득 메운 저 뒤편의 녀석들까지…. 요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학원 다니느라 놀 친구가 없고, 학원 주변 외에는 아이들을 구경할 수도 없는 요즘의 골목길 풍경과는 대조적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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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에 찍은 사진이니 지금으로부터 40년이 넘은 광주여고 앞길의 모습이다. 이 골목 주변은 지금도 아이들이 많이 다니기는 한다. 하지만 40년 전의 그 때 아이들과는 달리, 요즘 아이들은 동명동 일대에 즐비한 학원을 다니느라 어깨가 쳐져있다.

 광주여고 앞 도로는 그 때나 지금이나 폭이 똑 같다. 그곳을 뛰놀던 아이들 외에 변한 것이라면 상가 건물들 뿐. 도로변 상가 건물들은 반듯해졌거나 조금 높아졌을 뿐이다. 한적해 아이들의 놀이터였을 거리는 자동차들이 차지했고, 사람들은 많아졌으나 모두들 바쁘기만 하다. 특히 사진 속 골목 뒤쪽은 지금, 공부만 하는 학생들이 득실거리는 ‘학원가’로 변해있다.

 비록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어도, 적어도 골목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뛰고 구르고 장난치며 함께 크는 아이들, 그런 녀석들이 가득한 골목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옥렬_전대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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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9 08:00 2009/07/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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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흑백사진 6. 동계천변

글쓴이 baezzang   2009/07/01 16:37 GJ Library/추억 상자    

동계천변

 고단했지만 아름다운 사랑 넘쳤을 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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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인시장 입구 동문다리~전남여고 후문쪽 동계천 주변(1951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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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위를 복개하여 도로로 변한 현재의 동계천변 모습


과거 천변이나 노변(路邊)은 가난한 이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요즘이야 물길이 흐르는 주변이 전망 운운하고, 길 가 땅이 더 높은 값어치로 거래되지만 옛날엔 언감생심이다. 없이 살고, 힘없던 이들이 밀려나 살던 곳이 아니던가. 물길 가의 위험하고 지저분한 환경, 길 가의 어수선함이 결코 좋은 환경이 아니요, 가진 자들이 선호할 곳은 더더욱 아니었으리.

사진 속의 좁은 개천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지붕 낮은 초가집들이 그런 짐작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1951년에 찍은 사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 사진이 보여주는 풍경이 그렇다. 사진은 지금의 대인시장입구에 있었던 동문다리에서 전남여고 후문 쪽으로 난 동계천 주변을 보여주고 있다(동문다리에서 보면 전남여고쪽하고 지금의 대인시장쪽을 볼 수 있었으나 이 사진 오른쪽 그림자로 보아 전남여고쪽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큰 물이라도 진다면, 내는 넘치고 물은 집으로 달려들었을 것이고, 가난했던 이들은 이불 몇 채 이고지고 피난길이라도 올랐을. 물이 마르면, 곱지 않은 향기를 내며 썩어갈 얕은 내와 함께 일상을 보냈을. 참으로 가난하고 힘들던 시절의 모습이다.

그러나 꼭 어찌 그런 시선으로만 바라볼 것인가. 힘없는 작은 흙다리 하나로 이어진 개천 좌우의 이웃들은 지금보다는 훨씬 살가운 정을 주고 받으며 살았으리라. 늦가을(또는 초봄?)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어느 날, 손녀는 걸리고 손자는 등에 업고 길을 나서는 어머니,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도 정이 흐를듯 여유롭기만 하다. 천변에 작은 초가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고 어디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정마저 없었을 텐가.

이곳은 지금 개천위를 아예 덮고 도로로 만들어 길이 되어 버렸다. 천변을 오갔을 정겨운 추억은 이제 없다. 대신 길가로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섰고 동계천의 추억은 나이 든 어른들의 기억속에만 있을 뿐이다. 과거 사진에서 보이는 동계천의 약한 S라인은 지금의 길에 그대로 드러난다. 왼쪽 판자로 둘러친 담벼락의 선이 지금 빌딩의 모습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도 신기하다. 왼쪽 길가 건물은 양철지붕인 것으로 보아 보통의 주택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고 나머지는 모두 주택이었을 것 같다. 주택가였던 이 곳이 대부분 상가나 높은 빌딩으로 변해 있으니 세월의 흐름을 짐작할 뿐이다. 세월 앞에 인간 삶의 모습은 너무도 많이 변해버려 이제 흔적조차 없다. 팍팍했지만 정겨움이 흘렀을 동계천 주변의 삶이 그리워진다.

                                                                                                                                    
김옥렬_전대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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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1 16:37 2009/07/0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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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흑백사진 5. 47년 충장로의 기억

글쓴이 baezzang   2009/06/08 13:23 GJ Library/추억 상자    

47년충장로의 기억

충장로, 그리고 충장로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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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충장로 5가. 전국농구대회 우승을 자축하는 한 여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충장로를 행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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윳놀이를 즐기는 시민들<충장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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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식교복을 입은 밴드부<충장축제>


지금은 도시가 다극화되어 사라진 말이 하나 있다. ‘시내(市內)’라는 단어. 과거 우린 충장로 일대로 약속시간을 잡을 때 “시내서 보자”고 했고, “시내 간다”고 했다. 광주라는 도시의 중심은 당연히 충장로 일대였다. 따라서 충장로가 아닌 다른 지역은 ‘시외’가 되었던 셈이고 충장로는 시내, 즉 다운타운(downtown)의 개념으로 쓰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상무지구, 일곡지구, 첨단지구, 금호지구 이런 도심 속 작은 도심들이 속속 생겨났고, 그 지역에도 먹고 놀고 마실 수 있는 충분한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도시는 이제 완전히 ‘다극화’되어 버렸다. 따라서 “시내서 만나자”라는 말은 할 수가 없게 된 것. 아마도 90년대말까지나 쓰였을 말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우린 또 추억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우다방’앞에서 친구를 만나고,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척 하며 시간을 죽이고, 무등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가든·화니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충장로 5가까지 술집을 찾아 뒤지다 보면 어디에선가는 반드시 아는 이를 만나곤하던 그 곳, 충장로.  도시가 발달하고 사회도 다원화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고 환영할 만한 일이로되, 익명성과 복잡함만 커지고 애틋한 정은 없어져 간다는 점에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진첩 속에서 발견한 오래 전 충장로의 모습 역시 화려했던 명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1947년 충장로 5가의 모습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전국농구대회에서 우승한 여학교의 거리 행진 모습’이라고만 되어 있으니 어느 학교인지, 무슨 대회에서 우승했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 여자고등학교에 농구팀이 있었다면 수피아여고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아쉽게도 수피아여고 역사자료집에는 1947년 무렵에 대한 자료가 없다). 어쨌건, 전국대회에서 당당히 우승했으니 시내에서 행진을 할 만큼 큰 일이었을게다. 해서 축하거리행진이 열렸고, 그 행진로는 당연히 충장로였다. 아마 1가에서 5가까지 퍼레이드를 한 모양이다. 금남로는 고사하고 이보다 더 크고 반듯한 중심도로는 없었을테니까. 늘어선 전봇대에 양화점간판이 보이는 충장로5가의 모습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지만.

 오랜 시간 동안 광주를 대표하던 충장로거리가 한 동안의 침체를 벗고 이제 다시 살아날 움직임인가 보다. 공동화라고까지 할 정도로 침체되어가던 이곳을 살려보기 위해 관청에서는 추억을 되살리는 충장로축제까지 기획했고, 제법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이다. 올핸 충장로거리에 나가 옛 추억이라도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지… 아무리 도시가 커지더라도 광주를 대표할 만한 거리, 상징거리로 충장로가 영원하길 기원해 본다.

김옥렬_전대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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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8 13:23 2009/06/08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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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흑백사진4. 아득한 추억 속의 '뽕뽕다리'

글쓴이 baezzang   2009/05/18 18:43 GJ Library/추억 상자    

아득한 추억 속의‘뽕뽕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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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뽕뽕 다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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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로 변한 현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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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를 건너는 재미도 쏠쏠 하겠다>


‘뽕뽕다리’라는 이름부터가 너무 정겹다. 구멍이 ‘뽕뽕’ 뚫렸다해서 뽕뽕다리. ‘철제다리’나 ‘철판다리’도 아니고 ‘뽕뽕다리’라는 이름을 지은 이들의 감성도 재미있다.

양3동 발산부락과 (주)전남방직을 잇던 이 다리. 지금은 추억으로만 남아있지 찾을 수가 없다. 사실 이 다리의 재료(?)가 됐던 공사장 발판도 요즘은 보기가 어렵지 않은가. 과거엔 건축 공사장에서 모래나 벽돌을 지고 오르내리기 위해서 설치하는 임시계단을 바로 이 구멍 뽕뽕 뚫린 철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공사현장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는 마당이니 이런 건 구경하기가 쉽지 않게 됐다.

뽕뽕다리는 산업역군으로 이 나라 경제부흥의 한 축을 담당하던 전남방직 공원(工員)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공장이 활발해지면서 공원들이 늘어났고, 그 늘어난 공원들은 광주천 건너 발산부락에 많이 살았나보다.

1967년에 찍었다는 위 사진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모두 전남방직에 근무하던 여공들이 아니었을까? 미니스커트에 양산으로 한껏 치장하고 그 길을 건넜을 산업역군, 언니 누나들에게 이 뽕뽕다리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그나마 편하게 건널 수 있는 고마운 다리? 삐거덕거리고 뾰족구두 뒷축이 빠지는 불편함? 또 비로 불어난 이 다리를 건너다 고무신이라도 잃어버렸을 철수에게, 변변히 내를 건널 수조차 없던 발산마을 주민들에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자료사진은 1967년에 찍혔다. 그로부터 4년전 생긴 서림교회 첨탑과 주변 자연마을들도 보인다. 둑이 낮아 냇가와 가까운 모습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뽕뽕다리가 언제 없어졌는지는 정확히 아는 이가 없다. 다리는 없어졌지만 지금도 발산부락과 전남방직쪽 마을 사이에 교통의 필요성은 있나보다. 지금은 돌로 된 징검다리가 놓여 있으니…….

 뽕뽕다리는 이제 없다. 그러나 뽕뽕다리가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깊이 박힌 광주의 ‘명물’이었음은 분명하다.


김옥렬<전대신문편집위원>


** 많은 영화에서 '다리'는 사랑을 이어지는 '메신저'로 등장합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광주의 무지개다리.. 과거에 이 뽕뽕다리는 어떠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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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흑백사진3. 57년전 광주천

글쓴이 baezzang   2009/04/27 08:03 GJ Library/추억 상자    

57년전 광주천,
빨래하는 아낙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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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지금은 어딜 가도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도심은 물론이려니와 시골에 가도 맑은 봄날 냇가에 아낙네들이 몰려나와 수다를 떨며 빨래하는 모습들. 시골이라도 어디 빨래할 아낙들이 없고, 그나마도 빨래는 기계의 몫이 된지 오래.

 이 한 장의 사진은 광주라는 도시가 산업화 전엔 얼마나 맑고 깨끗했으며 시골스러웠는지 짐작케한다. 1951년에 찍은 것이라고 전해오는 이 사진의 배경은 지금의 태평극장 앞 광주천. 사진 멀리 뒤로 보이는 다리가 1933년 건립된 ‘광주교’.
 
이 다리가 사진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맑은 물이 흐르고, 날씨 좋은 어느 봄 날 동네 부녀자들이 모두 나와 빨래를 하고 개구장이들은 봄볕이 즐거운가 보다.
 
 지금 그 자리, 그 곳엔 아낙네들도, 아이들도, 빨래 두드리는 방망이 소리도 없다. 천은 정비되어 있고 천 가장자리엔 조경과 함께 운동시설도 들어서 있으나 물은 더러워졌다. 빨래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상황.

 단지 시민들의 산책 또는 가벼운 운동장소로 이용될 뿐이다. 아련한 추억이다.



                                                                                                                            김옥렬 <전대신문 편집위원>

* p.s. 그때 광주천에는 사람들의 이야기 꽃이 피었겠군요.  개똥이네 말똥이네 이야기가 자연스레 소통되던 공간....지금 잘 정비된 광주천에 빠진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스스럼없는 소통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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